왜 미국행을 택했냐고 물어봐 주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 정리해봅니다.
나는 좋은 선택을 내리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같은 것은 아니다. 비용만 생각해도, 어떤 선택은 저렴하게 되돌릴 수 있지만, 어떤 선택은 비싸거나 불가능할 수 있다. 직업을 선택하고, 회사를 선택하는 일은 비싼 편에 속한다. 선택한 결과가 나와 잘 맞는지, 전망은 어떠할지 판단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잃을것이 많아지기에 선택을 뒤집는 비용은 더 커진다. 이처럼 비용이 큰 선택은 비용 자체가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커리어에 대한 선택은 많은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미국에서 개발자로 일하는 커리어에 대한 나의 고민을 정리해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미국에서 일하는 것이 시도할만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이 선택이 모든 사람에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주의: 글을 더 진행하기에 앞서 본 글은 편협하다고 적어 두겠습니다. 미국에서 개발자로 일한다는 것은 넓은 범위를 의미합니다. 실리콘밸리 대기업에서 디렉터로 일하는 것, 뉴욕의 스타트업에서 풀스택 개발자로 일하는 것, 시카고의 금융회사에서 IT 컨설턴트로 일하는 것은 모두 다릅니다. 제 경험과 판단은 주제보다 매우 좁으며, 속도가 빠른 업계의 특성상 여기서 가정하는 많은 사실이 조만간 혹은 이미 더는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미국과 실리콘밸리를 동일시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미국행을 고민하다가 미국을 갈 거면 실리콘밸리로 가자고 결정을 더 먼저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와 미국은 절대 같지 않음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민의 시작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선택의 구조에서 정리했듯이 주체가 없는 좋은 선택은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어떤 분야에 흥미를 느끼는가? 어떤 분야를 잘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내가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정을 미루는 것 역시 비용이 큰 선택이기에, 지금까지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결정했다. 내가 중요한 만큼 대상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미국의 어떤 부분을 보고 판단했을까? 우선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시장의 규모이다. 실리콘밸리만 살펴봐도, 개발자가 중요한 기업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해 볼 수 있다. 괄호 안은 2015년 최고 시가 총액을 나타낸다: Apple ($775b), Google ($478b), Facebook ($270b), Oracle ($195b), Qualcomm ($118b), Netflix ($50b), Uber ($40b), Tesla ($36b), Twitter ($35b), … 규모도 놀랍지만, 사업 분야가 굉장히 다양하다. 그만큼 수입원이 다양하고, 각종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리고 대체로 기업들이 젊다.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고, 고객이나 직원을 만족 못 시키는 회사들은 빠르게 사라진다.1 회사들의 이런 무한 경쟁은 흥미로운 효과들을 만든다. 예를 들어, 좋은 의견이 승리하는 경향이 강하고, 윗사람이라는 이유로 안 좋은 사견을 밀어붙이기는 어렵다. 그것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효율성이 충분히 큰 회사는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만큼 효율성의 압박이 개개인에게 강하게 가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단점일 수도 있겠다. 한국도 대단한 시장이다. 삼성($250b)은 두말할 것 없고, Naver ($25b), Kakao ($8b), Nexon ($7b), NCSoft ($5b) 등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 신생 기업은 2006년에 생긴 Kakao뿐이고, 시가 총액을 다 합쳐도 2009년에 생긴 Uber 정도이다. 그리고 게임, 포탈, 메신저 사업 외에는 다양한 수입원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이런 차이는 후에 더 정리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정리가 될 때, 미국행을 선택하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한 부분은 성장과 임팩트 두 가지이다.
첫째, 커리어 초반에는 성장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갖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선호했다. 예를 들어, 1년에 50%씩 성장할 수 있지만,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곳과 지금 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곳이지만 1년에 10%씩만 성장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전자를 택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이유는 <표 1>을 보면 명확하다. 긴 커리어를 봤을 때, 지금 능력의 사소한 차이는 큰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능력이 하나의 숫자로 평가될 만큼 단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장이 주는 즐거움까지 생각하면, 성장률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왜 미국에서 더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까? 미국 회사들이 윤리적으로 더 훌륭해서는 아니고, 시장이 큰 곳에서 성장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십억 명의 다양한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실리콘밸리 회사들의 특성상 제품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 어려움은 연륜 있는 개발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백발의 개발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내가 계속 개발자로 남을지야 알 수 없지만, 성장의 여지가 매우 큰 것은 분명해 보이며, 개발 직군 외에도 이 논리는 적용되는 듯하다.
<표 1> 1.0에서 시작해서 1년씩 꾸준히 시작했을 때, 미래의 가치.
10년 | 20년 | 40년 | |
---|---|---|---|
50% | 57.7 | 3325.3 | 11,057,332 |
10% | 2.6 | 6.7 | 45.3 |
5% | 1.6 | 2.7 | 7.0 |
둘째, 더 큰 임팩트를 줄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임팩트는 여러 방향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의사도 임팩트가 크다고 할 수 있고, 몇백만 명 규모의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임팩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임팩트가 큰일은 그 자체로 재미가 있고, 보람도 있다. 추가로 임팩트가 큰일은 일 자체에 몰입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많은 서비스가 사용자에게 더 빠르게 내용을 전달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최적화 작업이 되었다면 속도를 더 줄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기업 입장에서는 이에 상당한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기업에게 가치가 같은 것은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아마존의 속도가 1초 느려지면 매출에 $1.6b 정도의 영향이 있다고 한다. 아마 한국의 어떤 기업에도 1초를 줄이는 게 그 정도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과 전혀 상관없이, 시장의 크기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아마존에서는 사용자에게 어떻게 빠르게 내용을 제공해줄 것인지 몰입해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얼마의 자원을 투자할 것인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원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꽤 넓은 범위까지는 다른 고민 없이 하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기업에도 개인에게도 굉장한 강점이다. 조금 더 추상적이고 단순하게 말하면, 임팩트가 큰일을 할 때는, 사용자에 온전히 집중하면서 최고만을 생각하면 된다. 작은 효과도 총 사용자에게 충분히 값어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이 충분히 크지 않다면 사용자에 온전히 집중하며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일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있다.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주장이고, 실제 상황에 적용될 때는 갖가지 사항들이 고려돼야 하지만 경향 자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임팩트가 크다고 재미나 보람을 못 느끼는 일이 할만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임팩트가 큰 것 그 자체에 이런 효과들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임팩트가 작은 일들은 위의 효과를 내는 것이 어렵다.
실제로 결정을 할 때는 더 막연히 결정했다. 다만, 그 결정의 바탕은 언급된 이유였던 것 같다. 위의 가치들이 미국에 간다고 당연히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회사를 고를 때 이 연장선에서 고민을 했고, 완벽한 곳이란 없기에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지 또 고민했다. 이민은 비용 부담이 큰 선택이다. 그래도 나의 비용은 기존의 실험들과 기회들 덕에 낮춰질 수 있었다. 미국에 오면서 정한 회사는 3개월간 일을 해본 곳이고, 다른 괜찮아 보이는 옵션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면서 불확실성을 많이 낮췄기에 더 좋은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고의 선택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있지만, 생각대로만 흘러가진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결정과 상관없이, 지금 미국에 온 것은 운이 크게 작용했다. 매해 까다로워지고 있는 비자 문제가 다행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겼다면 시간이 더 걸렸을 테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미국행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의 결정 또한 얼마나 유효할지 모르겠다만 한동안은 몰두해볼 생각이다.
One more thing 🔗
왜 글도 못 쓰는 공돌이가 긴 시간을 들여 이런 글을 썼을까? 물론, 내 생각을 정리하고, 후에 더 좋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이다. 하지만 추가적인 욕심이 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국인 대다수의 기본 옵션은 한국 시장이고, 다른 시장에서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있다. 그런데 전 세계 70억 명의 사람이 각기 다르듯이 시장들도 마찬가지다. 세법에서부터 시장과 대중의 가치관 등이 나라마다 유의미하게 다르다. 같은 주주 자본주의라는 제도를 택한다고 해도, 내부 사정은 꽤 다를 수 있다2.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미국 시장이 더 합이 잘 맞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나고 자라면 그 밖을 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 글이 미약하나마 바깥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최근에 경기과학고에서 비슷한 주제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슬라이드 참고), 정보나 수학 경시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흥미로울지도 모르겠다.
소프트웨어 업계의 성지라고 불리는 실리콘밸리에 아직 한국인의 영향력은 크지 않은데, 기본적으로 수가 적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CEO는 인도의 대학을 나온 인물들이 하고 있지만, 한국의 교육을 거친 사람들은 이 정도 영향까진 못 주고 있다. 나는 많은 사람이 시도 한다면 이제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독특한 한국 시장인 만큼 한국에서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해외에서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3. 그런 개인들은 상황이 허락한다면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본인들에게 더 좋을 수 있다. 해외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한국의 기업들 또한 더 좋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해외 시장에서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도 좋은 일이다. 이 흐름이 가속화되면 더 많은 사람이 해외에 진출하기도 쉬워질 거고, 국내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의 업무 환경도 개선될 거라고 굉장히 긍정적으로 기대해본다. ∎
더 읽어볼만한 자료 🔗
- 김현유(미키김) 님의 실리콘밸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미 구글에서 다년간 일하신 경험을 한국인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적어주셨습니다.
- JM북의 저자 구종만님의 외국인 노동자의 삶: 좀 더 구체적으로 뉴욕에서 외국인 개발자로 사는 모습을 발표해 주셨습니다.
Credit 🔗
Giuseppe Milo, The Golden Gate Bridge San Francisco United Sta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