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등학교에는 20대에 박사 학위를 받은 졸업생들의 명단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를 가고, 석박사를 마치는 선형적인 커리어에서 목표들을 빠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롤모델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80% 이상은 조기 졸업을 했고, 나를 비롯한 남은 고3들은 꽤 측은지심을 받을 수 있었다 (묘하게도 가장 속 편한 한 해였다.)
학부를 미국으로 나오면서, 이런 선형적 성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 인턴으로 일하게 된 회사의 창업자는 대학도 중퇴한 사람이었고, 직원들도 학위는 안중에 없었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힘들어도 문제만 잘 풀면 많은 기회가 있었다 (당시 룸메가 화장실 수건 내 거냐는 질문을 열 번쯤 해도 못 알아들어서 직접 데려간 미안한 기억이 있다). 근무 시간에도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스케이트 타며 시끌벅적했지만, 주말이나 밤도 별로 신경 안쓰면서 일하는 에너지도 신선했다. 이 회사는 잘돼서 상장도 하고, 어느새 시총은 삼성전자의 4배가 넘었다.
한 발짝 물러서 생각해 보면, 연공서열 같은 선형적 모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있다. 하지만 단순한 경험의 축적이 가치가 되는 농경 사회의 모델은 끝난 지 오래다. 대신 커리어를 지속적인 문제 해결 과정으로 보는 관점이 더 유용해 보인다. 좋은 문제를 잘 풀면, 높은 성과가 나고, 그런 개인의 평판은 더 좋은 기회의 문을 열어주곤 한다.
내가 고등학교 때 생각하던 선형적 모델은 여전히 ‘성 안’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성 밖’은 매우 다르다. 물리적인 성벽은 사라졌지만, 사회의 관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성 안은 전통적이고, 체계적이며, 안정적이다. 성 밖은 자유롭고, 역동적이며, 혼란스럽다. 각 세계는 나름의 장단이 있고, 당연히 다른 가치 체계를 갖는다.
이 두 세계를 섞으면 비현실적인 결론들에 도달하곤 한다. 누군가는 미국에서 학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이비리그나 MBA 타이틀이 중요한 세계는 여전히 건재하다. 아무리 환자를 잘 치료하더라도, 적합한 자격증 없이 행하는 의료 행위는 대체로 불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강사라도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하다. 외국인은 애초에 학위가 있어야 비자를 받고 일하는 게 가능하기도 하다.
성 안과 밖의 차이 🔗
커리어 계획에서 혼란은 주로 다른 세계의 가치를 잘못 적용할 때 발생한다. 성 밖의 커리어를 준비하면서 학위나 자격증만 계속해서 모으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성 안의 직업을 목표로 하면서 ‘경험’만 강조하다가는 필수 자격 요건을 놓칠 수 있다.
성 안 | 성 밖 | |
---|---|---|
성과 | 학력, 자격증, 고득점 | 제품 개발, 매출, 비용 절감 |
가치 | 제도, 지식 | 시장, 활용 |
방향 | 위에서 정해져서 아래로 하달되는 경향 | 아래에서 필요한 결과들이 발생하는 경향 |
기준 | 대체로 고정적. 큰 틀은 쉽게 변하지 않음. | 유동적. 하나의 표준도 금방 구식이 됨. |
관계 | 제로섬, 서열, 명분과 절차 | 변동적 협력, 약육강식, 결과 만능주의 |
방법 | 엄격함, 완벽주의, 최적화 | 유연성, 실험정신, 빠른 반복 |
직업 | 의사, 변호사, 교사, 공무원 | 프리랜서, 세일즈, 엔지니어, 디자이너 |
물론, 현실의 복잡한 세계는 성벽으로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성 안의 직업군이 자신들의 이점을 활용해 성 밖에서 사업을 일구기도 하고, 성 밖의 직업군이 성 안으로 편입되면서 역학 관계가 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5년의 빅테크는 2010년대에 비해 훨씬 더 제도화되면서 성 안의 특성들을 많이 흡수하고 있다. 동시에, 성 밖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확장되고 있다.
성밖의 전략 🔗
전반적인 성장 전략은 전 글들 <커리어 굴리기> v1과 v2에서 적었으니, 이번엔 성 밖에서 특히 중요한 전략 5가지를 짚어본다. 개인적으로도 무심코 튀어나오는 성 안의 습관들이 여전히 다루기 어렵다.
- 지식 → 결과: 박학하면서 결과를 못 내는 사람보다, 전문 용어들도 모르면서 결과를 내는 이들이 성 밖에서는 더 빛난다. 역동적인 성 밖에서 지식은 불변의 고귀한 진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변수일 뿐이니, 완벽한 이해보다는 빠른 실행이 중요하다.
- 표준화 → 개인화: 정해진 기준을 따르기보다 나에게 맞는 문제를 찾을 여지가 많다. FOMO에 조급해하기보단 판을 넓게 보면서 ‘나’에게 맞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강력한 힘이 된다. 빛나는 학위보다 비용을 1,000원에서 990원으로 줄인 실적이 더 믿을 만한 경력이 될 수 있다.
- 넓이 → 깊이: 전과목 만점보다 특출난 한두 과목을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개인의 역량은 어차피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못하는 분야뿐 아니라 어중간한 분야들도 과감히 쳐내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전략이다.
- 완벽 → 속도: 100점짜리 결과물을 3개월에 걸쳐 만드는 것보다, 80점짜리를 1주일 만에 만드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 어차피 기준이라는 것도 변하기 때문에, 근자감과 용기를 갖고 피드백을 빠르게 수용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 위험 회피 → 관리: 성 밖은 기본적으로 위험이 깔려 있고,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위험한 선택이 되곤 한다. 어차피 위험이 없는 선택지는 없으니,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위험도를 늘려가면서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성 안의 정형화된 교육은 여전히 의미가 있고,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오래도록 유효하다. 다만, 어느 정도 정석을 익혔으면 아무리 좋은 틀도 제약이 되곤 한다.
일단 기본기가 다져지면, 그때부터는 다시 망아지가 되어야 한다. – 조훈현
개인과 사회 🔗
개인은 자신의 성향과 기대 수익에 맞춰 움직인다. 그리고 사회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성 안과 밖의 두 세계가 조화롭게 성장해야 한다. 구성원들이 한쪽으로만 쏠리는 것은 개인의 실책보다 훨씬 돌이키기 어려울지 모른다. 역사적으로도 성 안만 선호하게 만들던 조선과 청의 쇄국정책은 사회를 100년 단위로 후퇴시켰다. 물론 그 반대 방향의 무자비한 약육강식도 피해야 하니, 각 사회마다 필요한 균형점은 다를 것이다.
성 밖을 양성하고 싶다면 접근법도 달라야 한다. 사회적 정책은 복잡하고 다양한 부수 효과가 있으니 간단히 방향성만 적어본다.
- 간섭의 위험: 성 밖의 미물들에 비해 성의 힘은 압도적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성의 간섭은 시장을 교란하고 생태계를 메마르게 한다. 고용 안정성이나 최저임금 같은 너무나 당연히 좋아 보이는 정책들도 마찬가지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연봉이 몇 배씩 오르기도 하고 당일에 해고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 금융 안전망: 당연히 모든 간섭이 악은 아니다. 강한 성 없이는 자연스레 약육강식이 펼쳐질 것이고, 소액주주들은 무시받으며 이는 생태계 전체를 침체시킨다. 최근 언급한 $HCP 인수 사례에서도, 의결권을 독점한 소수의 대주주와 내가 같은 권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성의 안전망 덕이었다.
- 세율: 세금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높은 근로소득세는 성 밖의 에너지를 좌절시킨다. 성 밖의 저자본 미물들은 거주비 부담까지 크기 때문에 이중으로 괴롭다. 제도로 돌아가는 성 안과 달리 구성원들의 역동성이 더 중요한 성 밖에 이는 더욱 치명적이다. 보유세 등에 비해 저항도 약해서 가장 먼저 두들겨 맞곤 하는데, 이 추세는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강해지기 마련이라 특히 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과거보다 성 간의 이동이 쉬워졌고, 이미 성 밖에 있는 존재들은 성 안만 풍요로운 동네보다는 성 밖이 풍요로운 곳으로 더욱 끌리게 된다. 다만 성 밖은 역동적이고, 강한 탈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이동을 얼마나 어렵게 할지, 혹은 반대로 쉽게 할지는 지켜볼 일이다.